김목사님 (1)
최원석
2012.11.28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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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의 모습은
미래의 예표(가이드)라고 하면 어떨까 !
김진홍 목사님과 나의 만남을 소개한다.
부끄러움과 핏대가 동시에 떠올라 쓴 웃음이 저절로 ...
김목사님의 청계천 빈민 운동인,
지난 70년대 활빈 교회 사역 중,
아픈 훈이 엄마를 등에 엎고서 병원으로 갔는데,
한양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다가 ,
결국 길거리에서 김목사님의 등에서 인생을 마감한
그 슬픈 이야기는 70년대 민중의 한국 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한국이 사는 길은 교회당이 살아야 함을
토하듯이 절규 하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최근 두레 교회를 은퇴하신 김목사님은
한국 사회에 영향을 끼친 목회자 중의 한분이시다.
나는 한때 자칭 김사모 노릇을 할 정도 였다.
김진홍 목사님을 사모하는 모임 (김사모)
나는 고신 교회에서 평생 몸담고 있다.
50년 이상 지금까지,
물론 개인적으로 쪼잔하고 촐랑스러움은 세월 지나가도 여전하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소승불교냐 대승 불교냐 하면
나는 소승 불교라고 할수 있다
반면 김진홍 목사님은 대승 불교라고 비유 할수 있다.
즉 쪼잔함과 통큰 스타일의 차이라고 하자,
80년대는 유신의 비극이 연장 되는 신군부 독재의 시절이었다.
광주 민중의 피비린내나는 역사의 질곡이
그시절 을씨년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대학 시절 혼돈의 시절을 보내던 중 이었다.
민중신학이 뭔지, 복음 주의가 뭔지,
광란의 폭풍이 나를 치던 시절을 끙끙 거리다가,
80년 대초 그당시 " 새벽을 깨우리로다" 라는 홍성사 에서 펴낸
김진홍 목사님의 활빈 교회 사역의 내용을 알게 되었는데.....,
70-80년대 고신 교회의 위치는 ?
소위 순교 신앙의 순결과 정통성은 나랑 무슨 관계인지 ?
그당시 우리 사회의 역류하는 모습과
고신 교회 안의 온실 속의 나는 모순 자체인 듯하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데,
80년대 나의 내면은 황폐화 로 인해 사막처럼 건조 하였다.
그러다가 김목사님의 책 "새벽을 깨우리로다" 는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하였다.
그이후 85년부터 약 15년 가량 김목사님을 따라 다닌 셈이다.
김사모 (김진홍 목사님을 사랑하는 모임) 처럼 행세를,
나의 20대 중반부터 40대 초반까지는
김 목사님의 강의와 설교 테이프는 나의 취미 생활 겸 즐거움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일종의 대리 만족이기도 하였다 싶다.
한편 2000년 이후에는 기기감감으로 변신을 한셈이다.
어이쿠, 90년도 늦가을 사건 하나를 소개한다.
22년 전 나의 핏대가 김목사님에게 바로 전달 되었다.
그당시 진주 복음병원에서 일하던 나는,
병원 이사장님으로 모시러고 초청한 식사 자리에서
나는 김목사님 바로 곁에 앉았다.
나에게 월급을 많이 주지 않으면 병원 그만 둔다고
허풍겸 고집을 피웠다.
부끄러운 나의 단면은 2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촐랑스러운 쪼잔한 그것이.....
졸필은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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