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 춘향
최원석
2012.09.0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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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오늘 본문 9절 유두고 사건은 억지 춘향 같다.
3층에서 떨어지면 팔다리나 머리를 심하게 다칠 수 있는데
멀쩡하게 바울이 다시 살리는 장면에서,
높이가 3층이라도 지금하고 건축 개념이 다르거나
창가에서 졸다가 떨어지니
밑에 아마도 방탄용 스펀지가 있었나 보다 싶다.
각설하고
도대체 믿음이 무엇인지 ? 스스로 묻곤 한다.
이것은 구도자의 길을 가는 나의 일생의 숙제이지만,
9월 숙제는
전도 대상자 준비
수요 예배 2번 참석 하기와
9-23 시편 암송 이다.
오랜만에 목장 모임을 하였다.
여름에는 사정상 방학을 하였는데,
재미 있는 대화 하나를 소개 한다.
치과의사인 나보고 묻는 말 중에 가장 대답하기
곤란 한 질문이 하나 있다 .
마치 유치원 아이 한테 묻는
엄마 좋아 아빠 좋아 하는 질문 인 셈이다.
"치과 잘 되요 ? "
나는 25년 째 치과 일을 하지만 수입이 변변찮다
십일조를 봉직의(월급 쟁이 시절) 때 에 가장 많은 60만원 수준이었다.
지금은 십일조가 40만원
대출 이랑 빚 생각하면 마누라는 십일조 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
나는 품위 유지 차원 또는 교회 의무로써 십일조를 한다.
나머지 십의 구는 누구 덕에 사용하는 것인지 ?
나는 가끔 고민하는 듯이 스스로 묻기도 한다.
때때로 밀려 오는 경제적 빡빡함이 힘들기도 하다.
겨우 입에 풀칠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하루 살이가 아닌 한달 살이 처럼 살아온 내가
스스로 신기하고 약간 어리석기까지 하다.
경제적 무능함이 나의 전부를 경직스럽게 만드니까 그렇다.
한편은 교회 안에 마저,
돈에 미쳐 사는 꼴을 흔하게 목격하니까 말이다.
천박 한 자본주의 발상이 온 교회 내부를
뒤흔드는 작금의 현실은 나를 너무 슬프게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본주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만약 흥덕 향상 마저 태동기에 이런 꼴에
함께 춤추는 작태를 주장한다면
오호라 슬프도소이다.
물론, 시대의 산물인 동시에 역사를 초월하는 공동체가
바람직한 공동체 곧 교회가 아닐 까 싶군요.
인생이 무어냐고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어냐고 물어신다면 ?
대답하기가 싶지 않다.
인생길에서 가치와 의미의 창조 작업이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는 길인데 싶다.
뒤돌아 보니 아마도 '내가 유듀고' 같은 인생이구나 싶다.
창가에서 변두리에서 이리저리 개기는 모습이 흡사
마누라는 제발 방안에서 폼나게 살기를 바란다만,
창문가 즉 억지 춘향이 아니라
자연스레 재미 있게 살수 없냐고 자주 말한다.
사도 바울의 가슴 속에 흐르는
노동의 신성함과
복음의 위대성을 함께 노래하는 나를 발견하는 그날이 곧 오리라
억지 춘향 같은 나에게도
가을비가 촉촉히 내리듯이
변함 없이 늘 은혜의 단비를 내가슴 속에 부어 주시니 !
기기감감의 노래와 눈물은 계속 된다.
댓글목록 2
홍성동님의 댓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졸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보면서 / 다시 살려서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최원석님의 댓글
예
나는 왜 죽게 하고 또 살리지 하고 ?
늘 이런 식으로 고민 합니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 처럼 생각 되군요.